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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공개 2탄> “정보요원 당시 내 이름은 최광애와 장혜숙 였다”  


기사승인 2021.01.29  14: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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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대 사업으로 성공한 北 국가안전보위부 출신 마영애 씨 

마영애 씨가 뉴욕소재 북한유엔대표부 앞에서 북한의 핵실험을 규탄하고 있는 모습.&#160;&#160;

마 씨, ‘백성룡 사건’으로 인해 중국으로 도주  
조선족 지인 도움으로 한국에 입국 성공

그가 자수성가(自手成家)로 부를 축적했음을 알게 된 나는 평양으로 돌아와 사실 그대로 보고서를 제출했다. 심지어 억울함을 담은 백성룡 씨의 편지를 시숙부를 통해 김정일에게 전달토록 했다. 북한에서는 이를 신소(伸訴)라고 한다. 내 양심상 허위보고를 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보위부에 의해 요주의 대상이 됐고 수개월 동안 정직처분을 받았다. 복직된 후에도 그들은 나를 계속 감시했다. 1997년의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북한 보위부는 1996년 이미 백 씨를 북한으로 유인한 후 간첩혐의로 체포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후 백성룡 씨의 처형(處刑)과 함께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1999년 2월 어느 날 북한 온성세관에 마약사건이 발생해 출장을 가 있던 나는 시숙부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백성룡과 친분이 있던) 민정기가 체포됐다. 다음은 네 차례다’

 빨리 도망가란 뜻 이었다. 난 그길로 뒤도 안 돌아보고 중국으로 도주했다. 아무런 소지품도 없었다”

(편집자주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남한의 국정원에 해당되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진 기관이다. 국가안전보위부의 명칭은 1982년 국가보위부로 바뀌었다가 1993년에는 다시 국가안전보위부로 개명됐다. 그러다가 2016년 현재의 국가보위성으로 이름이 또 다시 바뀌었다. 그러니까 마영애 씨는 국가보위부와 국가안전보위부 시절 정보요원으로 활동한 셈이다)

-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나?

“중국에서 오랜 기간 정보요원으로 활동한 탓에 지인들이 많았다. 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중국에 1년 6개월간 머물렀다. 중국에 있으면서 백성룡 씨 가족에게 백 씨의 체포 사실도 알려줄 수 있었다. 한번은 이웃의 밀고로 중국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에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조선족 지인 오영복 씨가 5천 위안(현재 화폐가치로 5천 달러 상당)의 뇌물을 주고 나를 빼내 준적도 있었다. 난 나중에 귀인(貴人) 오 씨를 대한민국에 오게 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은혜를 갚았다”

- 중국에서 남한으로 갈 생각은 안 해 봤나?

“평생 붉은 물이 들어있던 까닭에 쉽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 씨의 집에 머물며 한국방송을 실컷 보게 됐고, 내가 속아 살아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그래서 한국행을 위해 무작정 베이징 한국대사관으로 찾아갔다. 대사관 측은 내 신분을 확인한 후 ‘지금은 황장엽 선생 망명사건으로 인해 한중 관계가 안 좋아 한국행이 힘들다’며 ‘OO지역에 숨어 지내면 우리가 반드시 연락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3천 위안(현재 화폐가치로 3천 달러 정도)을 줬다. 대사관을 통한 한국행이 실패하자 오 씨는 한국행 브로커를 내게 붙여줬다. 브로커 비용도 모두 오 씨가 내줬다.

- 2000 9월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의 입국과정은 어땠나?

“타인의 여권에다 내 사진을 오려 붙인 중국여권을 소지했다. 브로커가 하얼빈 공항에서 반드시 3번 출국심사대를 통과하라고 했다. 매수된 출국심사원은 내 여권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여권에 출국 도장을 찍어줬다. 너무 긴장해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대한항공을 탔지만 이 비행기가 정말 한국으로 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안내방송이 마치 평양 말씨 같았다.

조심스럽게 승무원에게 물어봤다. ‘이 비행기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난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으로 갈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쁘게 생긴 승무원이 친절하게 말해줬다. ‘네. 한국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조금 안심 할 수 있었다.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해 모든 승객이 내린 후 나는 여승무원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는 북조선 평양에서 왔습니다’
내 말을 들은 승무원은 너무 놀라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이후 승무원의 연락을 받은 다른 승무원들이 와서 나를 감싸며 지켜줬다. 그리고 김포공항에 주재하는 국정원 요원들이 달려왔다.

국정원은 마영애 씨를
그야말로 탈탈 털었다

 - 대한민국의 첫 느낌은 어땠나? 국정원과 하나원 생활은?

“두려움과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차창 밖으로 거리의 풍경하며...
대한민국은 중국보다 더 선진국이었다. 국정원에 도착하기 전 건강검진을 하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남들은 아무리 늦어도 한 달이면 국정원 조사가 끝난다. 난 석 달 동안 독방에 갇혀 지내며 조사를 받았다. 정말 모든 것을 국정원 측에게 탈탈 털렸다. 이 과정에서 난 국정원이 상당한 정보력을 축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례로 국가안전보위부 고위직인 시숙부 얘기를 꺼내자 국정원 조사요원은 잠시 후 시숙부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맞냐’고 물어 봐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보위부 고위층의 사진은 북한에서도 기밀에 속하는데 국정원은 도대체 시숙부 사진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하나원에 넘어 가서도 수시로 국정원 조사에 불려 다녔다. 그만큼 10년 넘게 국가보위부 정보요원으로 일한 내게 빼 낼 정보가 많았으리라 본다. 나는 정말 아낌없이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국정원에 제공했다. 속아 살아 온 지난 세월이 분한 까닭도 있었다.

9기로 하나원을 수료했다. 하나원에서 나는 모범교육생으로 선정됐기 때문에 서울에 집을 배정 받았다.

그러나 서로 서울에 집을 배정받기 위해 싸우는 탈북자들을 보며 서울 집을 양보했다. 모두들 ‘서울집 양보는 하나원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하나원 측에서 대구(大邱)를 권했다. 대구가 살기 좋고 일거리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주저 없이 대구로 갔다.

하나원에서 지금의 남편(최은철)과 박상학 씨(당시 33세·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를 처음 만났다. 당시에는 현재 남편에 대한 남다른 감정은 전혀 없었다. 그때는 오로지 북한에 있는 남편과 아들 효성이를 남한으로 데리고 올 생각만 가득했으니까...

- 대구 생활은 어땠나? 대구에선 어떤 일을 했나?

“대구생활은 6개월 만에 싱겁게 끝났다. 주유소와 세차장에서 근무하며 모은 돈으로 어렵게 아코디언을 구입한 점이 기억에 남는다”

- 이후 한국생활은?

“하나원 동기 박상학 씨의 권유로 그의 집에 머물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식당을 하며 번 돈으로 북한의 남편과 아들에게 브로커를 보냈다. 아들은 한국으로 데려 올 수 있었지만 남편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아마 나의 탈북이 영향을 미친 듯 싶었다. 이후 남편이 사형을 당했다는 비보를 접하고는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

혼자 아들을 데리고 사는 내게 담당형사가 중매를 섰다. 상대는 하나원에서 만났던 최은철(당시 40세)씨였다

당시 그는 강원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국군포로의 가족이었다. 최 씨의 아버지는 강원도 정선이 고향이었다. 그런 까닭에 최 씨는 북한 온성탄광에서 일하며 하층민 생활을 했다.

외로운 사람끼리 결혼을 하고 식당을 함께 운영하며 평양예술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남편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내게 든든한 응원군이자 매니저 같은 존재이다”

마영애 씨 부부에게 폭언과 구타를 해 마 씨 부부를 미국에 망명하게 만든 남북청소년중앙연맹 총재 정경석(오른쪽). 친북좌파인 정경석은 국정원의 지시를 받고 마 씨 부부의 미국 일정에&#160;동행해 마영애 씨에게 북한정권 비난 발언 금지를 요청한 인물이다.&#160; 사진은 2006년 노무현 정권 당시 북한을 방문한&#160;정경석이 평양에서 북한 여성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 <사진 = 남북청소년중앙연맹>&#160;

- 미국은 언제 오게 됐나?

“2004년 4월, 나와 남편 그리고 두 명의 예술인 등 총 4명이 미국 땅을 밟았다. 미주한인사회를 상대로 한 공연 및 간증, 연방의회에서의 증언이 목적이었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지근거리에서 나를 지켜 본 임 기자님이 더 잘 알지 않느냐?” 마 씨와의 대면 인터뷰는 이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인터뷰는 오랜 시간 지속 됐지만 중요한 이야기만 간추려 보도하려한다.

노무현 친북좌파정권의 충견(忠犬) 
노릇한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사실 더 이상의 인터뷰가 필요 없는 이유는 기자가 미국 입국 이후의 마 씨를 15년 넘게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추적보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마 씨가 미국에 와서 북한을 비난하는 강연회를 하고 다니자 국정원의 지시를 받고 동행한 남북청소년중앙연맹 총재 정경석은 마 씨 부부에게 “북한을 비난하는 강연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 씨와 최 씨가 북한 비난발언을 계속하자 정경석은 마 씨 부부에게 폭언을 하고 폭행을 가했다.

강연회에서 최은철 씨가 국군포로들의 실상을 폭로하자 그는 최 씨의 멱살을 잡은 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정경석은 이 같은 일을 벌인 후 국정원에 보고해 마 씨 부부의 여권을 말소토록 했다. 노무현 친북정권의 국정원과 하수인은 이처럼 ‘정권의 충견(忠犬)’ 노릇을 철저히 수행했다.

정경석이 총재로 있는 남북청소년중앙연맹은 지난 2000년 설립된 좌파관변단체로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총재를 맡고 있다.

한 마디로 남북청소년중앙연맹은 정경석의 사조직처럼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람을 좌파정권의 국정원은 하수인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친북좌파 정경석은 노무현 정권에서 여러 차례 북한을 드나들며 접대를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남북청소년중앙연맹 웹사이트에는 지금도 그의 북한내 활동을 담은 사진들이 나열돼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정치탄압을 이유로 미국에 망명한 마영애 씨가 2009년 2월 6일 한국정부로부터 새로 발급받은 여권을&#160;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 앞에서 보여주고 있다.&#160;&#160;마 씨는 2005년 6월 미국내 한국공관에 여권기간 만료로 갱신을 신청했으나&#160;거부당한바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노무현 정권의 국정원은 이런 인물을 마영애 씨 일행의 감시자로 붙여 놓았던 것이다.
국정원과 정경석의 만행은 본지의 특종보도에 의해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이 문제는 한미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하게 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서 터진 ‘김대중 비자금 사건’과 ‘마영애 사건’의 심각성으로 인해 이태식 주미대사를 한국으로 불러 들여 대면보고를 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건 모두 <뉴스메이커>의 최초보도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정부의 압력과 비난여론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은 정권이 끝나는 날까지 마 씨 부부의 여권을 회복시켜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마 씨 부부는 미국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 했다.

2006년 9월, 미국정부는 마침내 마 씨 부부와 아들 효성 군에게 한국정부의 정치적 탄압을 이유로 가족망명을 허용했다.

아들 효성 군은 부모가 미국에서 무국적자 신세가 되자 2005년 6월,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다 국경경비대에게 체포됐었다.

2007년 한국에 이명박 우파정권이 들어섰다.
우파정권이 들어서자 약삭빠른 국정원은 역시 정권의 눈치를 봤다.

미국에 파견된 국정원 요원들은 마영애 씨 부부에게 지난날의 잘 못을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마영애 씨의 여권회복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었다.

기자는 2007년과 2008년, 취재차 한국을 10여 차례 방문 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했다.
기자는 한국에서 여당 국회의원, 청와대와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영애 씨 문제를 거론했다.

2009년 2월, 어느 날 당시 LA에 거주하던 마영애 씨가 감격어린 목소리로 기자에게 전화를 해왔다.

“임 기자님. 마침내 한국 여권이 나왔어요”
노무현 정권이 마 씨의 여권을 말소한지 3년 7개월만이었다.

현재 마영애 씨는 순대 사업으로 대박을 치고 있다. 오른쪽은 며느리 김연화 씨.&#160;&#160;

북한, “마영애를 살해하라” 
암살지령 내려

미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한 마 씨 가족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마 씨는 미주탈북자선교회와 국제탈북민인권연대를 조직하고 뉴저지, LA, 버지니아 등지에서 식당을 경영했다. 식당을 해서 번 돈으로 학비를 내며 그는 뉴욕과 LA에서 5년간 신학대학을 다녔다.

마 씨는 이후 신학대학원에 진학, 2018년 선교학 명예박사와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2014년 다시 뉴저지로 돌아 온 마 씨는 2017년 12월 29일, 마침내 포트리 소재 한남체인 내에 ‘마영애 평양순대(Ma's Korean Sausage LLC)’를 개업했다. 공장은 릿지필드 팍(Ridgefield Park)에 오픈했다.

연방정부에 상표등록도 마쳤으며 식품의약국(FDA)에 특허신청도 했다.

“당시는 학교도 마치고 마음의 안정은 이뤘지만 경제적으로 힘들 때 였습니다. 북한인권 운동을 병행하다보니 나가는 돈이 너무 많았어요. 돈 버는 일에 매진해 한인사회와 탈북자를 위하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 했었죠”

그의 순대사업은 나날이 번창해 2021년 1월 현재 ‘마영애 평양순대’ 상표를 부착하고 판매하는 업소(식당 포함)는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등지 9곳에 이른다. 심지어 모 대형마트는 측은 ‘마영애 평양순대’를 납품 받으며 자사 상표를 부착하는 꼼수까지 벌이고 있다.

마 씨 회사는 지난 11월, 펜실베이니아 지점을 개업한데 이어 1월 중으로 버지니아 애난데일 지점도 오픈 할 예정이다.

그는 3년 안에 미국과 캐나다 한인사회 전역에 자신의 순대를 공급할 계획을 갖고 있다.
“순대 팔아 번 돈을 정말 멋지게 쓸 각오입니다. 북한을 상대로 한 인권운동도 야무지게 할 작정이고요”

또한 마 씨는 지금까지 북한 문제와 관련해 1백 차례 이상 시위를 주도했다. 한인들과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예술단 공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단체 관계자들은 백악관, 유엔본부, 뉴욕 북한유엔대표부, 워싱턴 중국대사관, LA 중국총영사관 등지에서 북한과 중국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시위의 주제도 다양했다. 북한주민 인권문제는 물론이고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천안함 폭침과 금강산 피격 사건에 대한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북한대표부 관계자들 또는 친북좌파 한인들과의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북한정권은 “마영애를 암살하라”는 지령까지 내렸을 정도이다. 북한 입장에서 마영애 씨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인 셈이다.

지난 10월 23일, 마영애 씨는 뉴저지 주의회가 수여하는 사회공로상을 수상했다.&#160;&#160;&#160;마 씨가 이날 고든 존슨 주하원의원의 랄프 슈머 보좌관으로부터 상장을 전달 받고 있다.&#160;&#160;

“요즘 SNS 등을 통해 벌어지는 저에 대한 비난도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탈북자를 가장한 북한 정권 하수인이 이 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고 끝까지 싸워 이길 겁니다. 어렵게 번 돈이지만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 군자금(軍資金)으로 아낌없이 사용 할 계획입니다”

마 씨의 이러한 활동을 인정한 미국정부는 그에게 지난 수년간 굵직한 상을 10여 차례 그에게 수여했다.마 씨는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하는 사회공로상(2016년)과 연방정부 인권상, 뉴저지 버겐카운티 인권상(2017년), 2018년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는 사회공로상과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국토안보부로부터는 인권향상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또 지난 10월에는 뉴저지 주의회가 수여하는 사회봉사상을 수상했으며, 12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제3회 대한민국 사회공헌 나눔대상 시상식에서는 국제인권상을 받았다.

“혹시라도 저와 저희 직원에게 불편함을 느끼신 분들이 있다면 용서하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딱딱한 북한문화가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한인들이 보기에는 무뚝뚝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사업에 임하겠습니다. 그리고 북한주민의 인권향상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길 당부합니다.

순대 팔아 번 돈, 새해에는 더욱 의미 있게 사용 하겠습니다"

뉴욕 <뉴스메이커> 임종규 선임기자  chunjiinla@gmail.com

뉴욕 <뉴스메이커> 임종규 선임기자  chunjiin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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